하나님께서 입혀주는 옷(창3:21) 6월 28일
고후5:2-3 3절 말씀을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데 쉬운 성경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옷을 입는다면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모습으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로 번역되었다. 사람이 죽는 순간 영혼과 몸이 분리되는데 영혼의 덮개였던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으면 벌거벗게 된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죽어서 영혼과 몸이 분리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신령한 것으로 옷 입고 주님을 만날 것을 기대하였다(고전15:5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땅에서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주시는 옷 입는 것을 간절히 사모하라고 2절에서 말씀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는데 필요한 옷은 이 땅에는 없다. 예전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입혀 주셨듯이....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가 죄의 더러움을 씻겨내시고 준비하였던 새 옷을 입혀 주었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도들이 이 땅에서 보혈의 능력으로 죄를 씻고 하나님만을 사모하는 믿음을 보시면 하늘에서 예비하셨다가 입혀주실 옷이 있다.
성도들이 이 땅을 살면서 제일 사모해야 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고 마귀를 능히 대적하여 승리하는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옷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일부 성도님들이 세상의 명품에 마음을 빼앗기고 산다. 세상의 명품 옷을 입으면 잠시 기분은 있겠지만 이것을 입고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없고 마귀를 대적하여 이기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땅에서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명품 하나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옷을 입어야 한다. 이 옷을 입은 성도들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고,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무장되어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하고,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부름 받는 순간 하나님께서 입혀 주신 신령한 옷으로 단장한 것을 모두 앞에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영원하고 신령한 옷에 마음을 두는 성도님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제발 이 땅에서 아담의 무화과 옷과 같이 아무런 힘없는 옷을 만들지 말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벌거숭이들이 되지 말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받았지만 그 위에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하늘의 옷을 입지 못하여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부끄러운 자들이 되지 말자.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하늘 영원한 명품을 입고 이 땅에서 당당히 은혜를 누리며 마귀를 대적하여 이기고 마지막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서자.
창3:7, 21 아담이 스스로 입은 무화과나무 옷은 사단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못 선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아담이 하나님께 가려고 스스로 만든 옷이 무화과나무 옷이다. 자신들이 노력하여 만든 이 세상의 옷을 입고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 갈 수밖에 없었다(창3:7-10)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을 만나려고 교회에 왔지만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면 스스로 도망가는 성도님들이 많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옷을 입는 믿음이 아니라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로 옷 입는 것"(갈3:27)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예전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속였던 사단은 지금도 동일하게 스스로가 노력하여 만든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라고 충동질한다. 사단의 속임에 빠져 많은 성도들이 스스로의 의로움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옷을 만들어 입었는데 정작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한다(사64:6 사람들이 ‘의롭다’하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모두 더러운 누더기 같아서, 이것 때문에 망한다) 진실한 믿음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과 같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옷으로 준비된 성도만 가질 수 있는 당당한 믿음이다. 그런데 주님의 재림이 믿어지지 않고, 혹 믿어진다 할지라도 주님의 재림이 두려운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이유는 주님 만날 때 입을 옷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실한 성도는 "하나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만나주시고 나를 써 주십시요"하는 담대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영적인 옷을 입는 것에서부터 출발된다.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에덴동산을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에게 언제든지 하나님을 찾아 올 수 있는 가장 귀한 옷을 입혀주신다. 이것은 아담에게서 끝나는 사건이 아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서려면 하나님께서 친히 입혀주시는 옷을 입어야 한다는 예시다. 눅15장을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온다. 탕자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탕자를 목욕시키고 "그 제일 좋은(준비 된) 겉옷"을 입혀 주신다(눅15:22) 이것은 즉흥적으로 입힌 옷이 아니라 아들이 돌아오면 입혀주려고 아버지가 준비하고 계셨던 옷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옷을 준비하고 얼마나 기다리셨을까? 이 옷을 입는 순간부터 다시 아들의 권세를 회복하여 당당하게 누린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탕자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것을 누리고 승리하게 하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당당하게 들어 갈 수 있는 옷을 입혀주려고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가장 소망하며 사모해야 할 부분이다. 그런데 사단에게 속아 가장 귀한 것을 빼앗기고 세상의 먹고 입고 마시는 것만 목이 쉬도록 기도하고 있다. 이러한 기도는 아브라함에게 쫓겨났던 이스마엘이 광야에서 했던 기도다. 이제부터 이스마엘처럼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의 기도를 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며 감격하시는 기도를 하자.(마6:31-33 먹고 마시고 입는 기도는 다 이방인(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자)들이 구하는 기도. 이스마엘이 했던 기도. 성도들이 해야 할 기도는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께서 입히시려고 준비한 신령한 옷을 구하는 기도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입혀주시려고 기다리시는 "그 옷"을 사모하자. 주님께서 왜 먹고 마시고 입는 기도를 하지 말라하시는지.... 주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오직 하나님만 찾고 구하는 믿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출28:1-4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에봇’을 입으면 거룩한 제사장이 되고, ‘에봇’을 벗으면 죽는다(민20:2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벧전2:9) 스데반 집사가 설교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는 교회라고 하였다(행7:38)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회에서 믿음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준비하신 거룩한 옷을 이 땅에서부터 입혀주시기 원하신다. 이 땅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옷을 입은 성도들이 마지막 육체의 죽음을 맞았을 때 그들의 영혼이 벌거벗지 않고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입혀주셨던 신령한 옷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확실하게 입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왕 같은 거룩한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할 자들로 부름 받았다(벧전2:9, 출19:5-6)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세워지는 것은 우리의 열심보다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옷을 입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께서 입혀 주시는 옷을 입을 때 하나님의 권세를 힘입어 마귀를 이기며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풀어내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참된 성도가 된다.
하나님께서 입혀 주시는 옷을 입지 못하고 종교생활만 하면 그들은 마귀의 밥이 된다(창3:14, 19 뱀의 사명은 흙을 먹는 것이다. 뱀은 실제로 흙을 먹지 않는다. 이것은 영적인 말씀이다. 구원을 받았음에도 영적으로 제대로 살지 못하고 육적으로 살아가는 자들,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옷을 입지 못하면 뱀에게 쉽게 물린다. 마귀의 밥이 된다) 슥3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황폐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우려 하는데 오랫동안 공사를 할 수 없었다. 이때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데 사단이 그의 오른편에 서서 여호수아를 조롱한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까지 하나님의 사람을 쫓아와 사단이 조롱하는 이유가 3절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사64:6 겉은 화려한 제사장의 ‘에봇’을 입었지만 영적으로는 죄의 누더기를 걸치고 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안에서는 믿음이 가장 좋아 대제사장이 되었지만 영적으로는 아직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거룩한 옷을 입지 못했기에 사단이 그를 따라와 조롱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세우실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신 것은 ‘거룩’이다(출29:1, 44)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그 더러운 옷을 벗기고 여호수아 제사장의 죄악을 제하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셨다. 그리고 5절에 보면 머리에는 정결한 관(모자)까지 씌워주셨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긴 금패를 머리에 묶고(모자처럼) 다녀야 했다(출28:36, 39:30) 이때부터 사람의 힘과 방법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입혀주신 거룩한 옷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슥4:6 사람의 힘이나 방법이 아니라 그가 입고 있는 거룩한 옷의 능력으로 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하늘에서부터 준비하신 거룩하고 신령한 옷을 입혀주기를 기다리신다. 중부교회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믿음의 눈을 떠서 하나님께서 입혀주실 신령한 옷을 사모하는 믿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엡6:10-17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전신갑옷을 입자. 바울은 왜 '너희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여 신령한 옷을 장만하여라.'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입혀주는 전신을 감싸는 완전한 옷을 입으라"라고 했을까?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최선을 다하여 만들어 입었던 옷으로는 하나님이 부르셔도 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건축할 때 여호수아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정성 가득 준비하여 만든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갔지만 사단이 옆에서 조롱하는 것을 보았다. 이 세상에서는 제일 좋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마귀에게 조롱거리가 된 옷을 벗기고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옷을 입고서야 사단의 훼방을 끊고 하나님의 성전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을 바울이 잘 알았던 것이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마귀의 속임과 조롱을 끊고 승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고,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서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을 잘 알았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이 이 비밀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사람의 노력으로 만든 옷으로는 절대로 사단을 이기지 못한다(엡6:11 마귀의 계략을 대항하여 서려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신령한 옷을 입으십시오. 바울은 마귀를 분별하고 이기려면 하나님의 옷을 입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부터 준비하셔서 입혀주신 옷이 아니라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설령 하나님께서 부르셔도 피하고 도망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영광 앞에 당당히 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옷을 입기 위해서는 하나님만을 인정하고 바라 볼 수밖에 없다. 탕자의 비유에서 돌아온 탕자를 위해 아버지가 옷을 준비하고 기다렸듯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이 옷을 입혀 주시려고 준비하고 기다리신다. 성도들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입혀주시기 위해 기다리시는 신령하고 거룩한 옷에 마음을 두고 사모해야 한다.
계19:13 재림하시는 예수님께서 입고 오시는 피 뿌린 옷을 입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목적은 구원받은 성도들과 혼인잔치를 하기 위해서이며(마22:1-14) "양"과 "염소"의 믿음을 분리하시기 위해서이다(마25:31-34)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을(출29:44) 회복한 교회와 성도들과 혼인잔치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께서 입고 오시는 예복의 모습은 ‘피 뿌린 옷(십자가에서 흘려주신 피가 가득한 옷)이다. 신랑이 입은 예복이 ’피 옷‘이라면 신랑을 맞는 신부(교회와 성도)의 옷도 ’피 옷‘이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덮여진 모습이다(출12:22-24)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 땅에 남겨놓은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뿌려 덮어주시는 것이다(벧전1:2-4)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온전히 덮여진 믿음이 ’양‘의 믿음이며, 구원받았으면서도 하나님께서 보배로 인정하시는 예수의 피로 덮여지지 않고 자기의 의만 앞세우는 믿음이 ’염소‘ 믿음인 것이다(마25:31-44) 교회 안을 보면 사단에게 속아 ’염소 믿음‘을 가진 자들이 많다. 자기는 잘 믿는 것 같은데.... 주님께서 보실 때 ’염소 믿음‘이기 때문에(슥3장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믿음) 사단이 옆에서 훼방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항상 자기만 주장하는 삶이다. 하지만 ’양의 믿음‘은 자기는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덮고 있기 때문에 매 순간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드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믿음은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모든 순간 하나님께서 보배 로 인정하시는 예수의 피를 옷 입고 살아가는 믿음이다. 중부교회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예수의 피 옷을 입고 사시다가 주님 앞에 가는 순간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하늘의 신령하고 완전한 옷을 입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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